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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피임약'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4/17 그들만의 '피임'세상 (1)
<위기의 주부들> 의 가르시아가 넓은 정원이 한 눈에 보이는 아담한 욕조에 몸을 담근다. 나른하게 몸이 풀리자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이 닿는 작은 서랍을 열고 알약 하나를 입 속에 넣는다. TV를 보던 나는 흐름 상 그게 피임약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왠지 목욕과 피임약이라는 '낯섦' 에 시선이 멈췄다.


고백하면, 피임약을 매일 한 알씩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알게 된 나는 올해로 서른이다. 피임약의 존재는 알았으되 잠자리 다음 날 딱 한번만 약을 구해다 복용하면 되는(응급 피임약) 줄 알았다. 그 약이란 게 산부인과 처방전 없이는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으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무지함으로 위험천만한 임신과 피임의 경계 길을 십 년 넘게 걸어온 셈이다. 나름의 방법은 있었다. 규칙적인 생리주기를 염두해두고 그 날짜를 잘 표시해 뒀다. 어쩌다 빨간 색칠이 입혀진 날 느닷없는 뜨거움과 마주칠 때면 곤란했지만 상황마다 적절하게 대처해 문제를 잠잠케 했다. 콘돔 역시 유용했지만 그건 이상하리만큼 남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가 원하면' 내지는 '그가 갖고 있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매일 꼬박 한 알의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원치 않는 임신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지키는 서양 여성을 보고있자니 동시대를 사는 내가 새삼 나약하게 느껴진다. 단 한번뿐인 인생, 즐거움을 쫓는 노련하고 능동적인 항해사가 되고싶은데 피임에 있어서는 떨어지는 일만 급급하게 해대는 갑판원 같아서 말이다.  

런던에서 머물던 스무살 무렵 온갖 펍Pub 의 여자 화장실마다 콘돔 판매기가 놓여진 걸 보았다. 아니 콘돔과 콘돔 판매기를 동시에 처음 보았다. 당시엔 부끄러워 발음만으로 얼굴이 벌개졌던 ‘콘돔’을 또래의 친구들은 뽑기처럼 뽑아내 핸드백 속에 넣고 당당하게 남친을 만나러 가는구나, 역시 런더너 Londoner 들은 완전 쿨!하구나 싶어 한껏 상기됐던 기억. 그 후로 10년의 세월동안 나는 단 한 차례도 스스로 그것을 준비한 적이 없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구석구석 존재하는 문화적 차이가 한 몫 했을거다.) 이런 나인데 가르시아가 보여준 '먹는 피임약'은 더욱 아득하게 멀다. 피임 성공률 99% 와 각종 암 발생율 감소 그리고 여드름과 다이어트에까지 미치는 놀라운 부가적인 해택이 확실하데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이건 '약'보다는 '자연 치유'의 기다림을 선호했던 우리내 문화 속에서 자란 탓일 지 모른다. 한 달의 27일 동안 연속으로 한 개 얄약을 집어 삼킨다는 건.. 그래서 내게 아직은 어려운 일이다. 아쉬운대로 지갑 속 달력과 색연필이라도 챙겨 넣고 다녀야겠다.


Posted by 애플'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