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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 해야지?
아니, 오늘 괜찮아.
왜?
안전한 날이야.
... 정말?
응.


뜨겁게 타오른다 싶을 때 이렇게 한 번씩 김을 빼는 게 우리의 래퍼토리가 된 지도 꽤 됐다. 이제는 그게 꼭 싫지도 (그렇다고 좋다는 뜻은 아니고) 않지만, 콘돔을 찾고 뜯고 착용하기까지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라 멍. 때리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익숙해진 ‘김뺌루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피임’을 위해 피임약을 먹어보자며 스스로에게 결심하기까지는 이런 이유가 숨겨져 있을지도.

콘돔 해야 돼.
안 해도 돼.
왜?
나 피임약 먹고 있어.
응?
내가 약 먹는다고 콘돔 안해도 돼 이제.
...


그도 처음엔 완강하게 반대했었다. 피임약을 복용하려고 한다고 말문을 열기가 무섭게 에이, 안돼. 라고 했다. 예상했듯 몸에 좋지 않을 거라는 불확실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그의 이런 반응에 날 걱정하는 당신, 이라며 은근한 감동을 받고는 작은 논쟁조차 벌이지 않고 그 계획을 잠시 미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먹는 피임약에 관심을 뒀다. 애초에는 피임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지만, 생리주기와 생리통, 월경전불쾌장애증후군, 여드름치료 등등 피임약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것의 이점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 피임약 복용기: 이 매스꺼움, 혹시 부작용?

그리고 드디어 결심이 섰을 때, 이번엔 그에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서 약 복용의 첫 날을 맞았다. 어차피 내 몸은 나의 것,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판단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 날 보호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 뿐이라는 사실에 의지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피임약은 언제부터 먹은거야?
지난달부터.
괜찮데?
응, 다 알아보고 먹는거지. 이제 피임은 내가 할게~ 걱정 끊어. 으하하.


처음과 다르게 크게 걱정하거나 반대하는 내색이 없다. 워낙 내 결정을 존중해 주는 편이긴 하지만, 언뜻 아, 앞으로 어두컴컴한 방안 구석의 서랍을 허겁지겁 뒤질 필요가 없겠구나 싶어 내심 흐뭇해하는 것도 같고.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믿어 주는 것도 같고.

Touch by Marrie Bot


나처럼 바람 한 점에도 마음이 하늘로 갔다 땅 안에 묻혔다 하는 인간형은, 우리가 진짜 사랑하는데 아이가 생기면 그것도 축복이라며 태도로 당당히 섹스를 하는 남자도 멋지고, 네 몸이 내 몸이 아닌데 조심해야 한다며 피임을 위해 어지간히 애를 쓰는 남자도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자에게 기댄 채 몸을 지켜야 할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와 내가 이루고 있듯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를 믿고 지켜주는 게 최선이 아닐까.

<사랑, 그 환상의 물매>라는 책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조심스럽게 밀쳐두고, ‘피부’와 ‘말’로 연애하라고. ‘피부’와 ‘말’은 연하디 연한 것이니 부디 ‘연하게’ 연애하라고.
 
이 대목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 놓고 과연 ‘피부’와 ‘말’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그 뜻을 흐릿하게나마 헤아린 요즘. ‘피부’로 연하게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고 능동적인 ‘피임’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가 아닌 나 와의 사랑을 위해 피임약 복용은 꽤나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피임약 복용 1달째. 나의 선택에 지독한 확신이 든다.







Posted by 애플's

'피임'.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은 단어.

피임에 대해 그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얘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해보거나 확실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여자 친구들끼리도 말하기가 쉽지 않고, 남자들과의 대화는 더더욱 어려운. 그래서 그냥 확인되지 않은 대략적인 정보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설마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하며 살아간다 . 나같은 사람이 많은 탓에,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어떤 이들은 낙태를 감행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실 조금만 알면 더 현명하게 살 수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또 그냥 그저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Wise Woman's night Party 가 열린 잠원동 '프라비아



우연한 계기가 찾아와 세계 피임의 날 기념 행사에 다녀왔다. Wise Woman's night Party! 현명한 여자가 되기 위한 유익한 토크쇼와 파티가 준비된 자리였다. 아무래도 파티 때는 가수들의 공연(쿨, 샤이니)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반응이 뜨거울거라 생각했지만, 토크쇼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행사장 입구. 멋지다. @.@



부대행사로 바디 페인팅을 해주고 있다


손정민씨의 사회로 진행된 토크쇼에서는 와이즈우먼 홍보대사인 비앙카와 산부인과 전문의 등이 나와 피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손정민씨의 매끄러운 진행 덕도 컸던 것 같다.
 

비앙카님이 한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요즘도 오빠 믿는 사람 있느냐'는 것. ㅎㅎㅎ 얘기의 요점은 오빠들을 믿을 수 없으니 여성들이 피임을 하자는 아니었고, 피임이라는 것이 어느 한쪽의 의무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언제나 실패율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통해 피임이 잘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하고,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특히 여성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먼저 챙겨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피임약을 복용이 성공률이 여러가지 피임법 중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었다. 부작용이나 그동안 들어왔던 소문들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참 많은 오해가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물론 약이라는 것이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두통약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자신에 몸에 맞게 처방 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나 싶다. ^^

유용한 정보를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이야기 하는 자리여서 좋았고, 항상 그늘에서 이야기했던 주제를 이렇게 밖으로 꺼내 밝게 풀었다는 것도 참 좋았다. 큰 규모로 자주 진행되기는 어렵겠지만 종종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파티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토크쇼 뒤에 이어지는 파티에서는 쿨과 샤이니의 축하 공연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이 자리만큼이나 언제나 밝은 '쿨'. 이 나이에 오랜만에 연예인 보면서 좋아했다. 체면 차리느라 소리를 지르진 못했지만. ㅋ 친구 생일 파티 일정이 있어 '샤이니'는 못보고 왔음. 사실 나는 얼굴도 잘 모르는.. --;;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

유쾌한 쿨의 공연!


그동안 뛰었던 행사중에 가장 난감한 행사라던 쿨.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Posted by 슈테른

Virgin, Gustav Klimt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이었다. 그 날은 사복을 입도록 허락된 수요일, 나는 엷은 색 청바지를 입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배가 아파왔다. 그건 정말 이상하게, 아픈 거였다.

배가 아파...왜 이렇게 아프지... 똥배는 아닌데...
아파...아파.


육고를 건너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모호한 위험스런 길을 지나와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그대로 뻗어 누웠다. 배를 꾹꾹 눌러도 보고 뒹굴어도 봤지만 계속계속 아팠다. 이상해..이상해...


묵직한 통증이었다. 그간엔 느껴보지 못한 배탈 이었다. 허리도 뻐근한 거 같았고 기분도 나빴다. 엄마가 집에 도착하려면 밤 9시는 넘어야 했다. 아무 방법 없이 이 생경한 아픔을 스스로 견뎌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잠깐 고개를 돌렸던가. 언뜻, 벗어 놓은 청바지에 비친 붉은 자국이 보였다.

어! 이건 뭐지? 뭐가 여기 묻었지? 뭘 잘못 깔고 앉았나?


그 날을 더듬어 보면 난 참 더디게도 그것이 월경의 시작임을 눈치 챘다. 그도 그럴 것이 월경이 이맘때쯤 올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학교에서 알려주는 성교육 수업 시간이 있었지만 열심히 듣지 않았고, 그러기엔 내용이 지나치게 고리타분했었다.

어쨌든, 놀란 마음 가라앉힐 새도 없이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젊고 건장한 점원오빠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그 젊은 오빠를 보자 도무지 생리대를 가지고 계산대에 올려놓을 자신이 없었다.


나도 여자라고. 이건 여자에게 필수 용품이라고.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아, 안 돼. 난 너무 어리잖아. 아, 저 오빠보기 너무 창피해!! 


두 심정이 마구 교차됐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두 눈을 꾹 감고 생리대를 집었다. 쭈뼛쭈뼛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눈 깜짝 할 사이에 계산을 마쳤다.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아 하는 점원오빠의 행동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설마, 저 오빠... 부끄러워하는 날 배려한 걸까. 반신반의하며 집에 돌아왔다.

그리곤.. 그것을 속옷 위에 깔고 비밀스러운 밤을 맞고 조용히 잠이 들었다.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그 다음... 그 후로도 여러 번 생리가 진행될 동안 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생리대도 봉지에 싸서 집 밖에다 버렸다. 그런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생리’하는 것 자체가 시종일관 부끄러웠고 또 어쩌면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굳이 유난을 떨 필요가 있을까 라고 어린 나 혼자서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 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꼬박꼬박 한 달에 한 번 붉은 출혈을 본다. 첫날과 같이 요통을 동반한 이상한 배 아픔을 겪는다. 가끔은 화가 솟구칠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 지기도 하고 어쩔 땐 참 미안한 마음으로 1년에 두 세번 정도만 생리를 하는 생리 불순인 친구를 부러워도 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한 번쯤은 안하고 건너뛰고 싶다가도 그저 일상의 하루쯤으로 별일 아는 듯 받아들이면서.

생리 주기를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Gustav Klimt


최근, 피임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바로 생리 주기를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 지금 미국에서는 세 달에 한번만 생리를 할 수 있도록 짜인 피임약 세트가 한창 유행이다.

이미 피임약 복용 인구가 50%를 넘긴 미국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이 두 쪽 나도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그 날을 (물론 나의 자궁이 건강하다는 몸의 반응이긴 하지만) 건강상 아무 문제없이 건너 뛸 수 있다는 건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피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리 주기를 결정해 두 달에 한번 혹은 세 달에 한번만 생리를 선택해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그 길을 걸어가 보고 싶다.

지난 9월 이후 쭉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지금 계획은 휴약기를 두지 않고 (내가 복용 중인 ‘야즈’의 방식이라면 약 복용 25일 이후부터 나흘간의 위약 4알을 먹지 않고) 10월까지 쭉 피임약을 복용하는 거다.

그렇게 하면 내 생에 첫 생리 없는 가을을, 10월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의학상 피임약을 복용함으로써 2, 3개월, 길게는 6개월에서 1년 까지도 생리를 하지 않아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한다. 걱정 없이 도전해 볼만 하다는 뜻이다.


이제껏 생리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몸의 신호였다. 그렇다면 몸의 신호에 오롯이 의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생리 주기를 스스로 정하고 생리와 피임의 능동적인 방식을 선택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용기를 내야 하는 첫 도전임은 확실하지만, 지금의 나의 선택과 도전 덕분에 내 몸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주체적 여성으로써 내 몸과 한껏 가까워진 기분도 든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 꼼짝없이 당해야 했던 생리주기로부터의 탈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카운트 다운... 얼마 남지 않았다.


Posted by 애플's




오늘 밤, 훈남과의 데이트만큼이나 기다려졌던 파티 TONIGHT.
뭘 입고갈까...음냐음냐 ~

은밀한 쪽으로는 친숙해도 꺼내놓고 발음하기 왠지 어색한 ‘피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각국의 지성인이 서울 하늘 아래로 모이는 날, 바로 오늘 저녁 8시. 서울 잠원동 한강 시민공원 내 프라디아에서 ‘세계피임의 날’을 기념한  <Wise Woman's Night>
파티가 열린다.

‘세계피임의 날’(WCD; World Contraception Day) 은 인공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줄이고자 국제 성출산건강기구인 마리스톱스인터내셔널(MSI)를 비롯해 유럽피임협회(ESC), 국제소아청소년부인과연합(FIGIJ), 아태피임협의회(APCOC) 등이 주축이 되어 2007년 9월 26일 출범했다.

오늘 열리는 <Wise Woman's Night>
파티에서는 '피임’을 주제로 한 유쾌한 토크쇼가 펼쳐진다. 미국 UCLA 의대 산부인과 전문의 안드레아 랩킨(Andrea Rapkin) 교수, ‘Wise Woman’ 캠페인 홍보대사 ‘비앙카(Vianca)’ 강남 차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심성신’ 교수 등이 패널로 참석해, 건강한 성생활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보다 피임에 한발 앞선 선진국의 전문가들이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을지 벌써부터 자못 기대가 된다. 오랜 기간 고민 끝에, 자유롭고 즐거운 성생활을 위해, 안전한 피임을 위해, 기타 등등 몇 가지 이유 등을 더해 피임약 복용하기 시작한 내게 또 하나의 자극제가 될 만한 유용한 정보들이 쏟아지길 바라본다.

나뿐 아니라, 응급 피임약 판매량이 꽤나 높은 우리나라에서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청춘 남녀들이 뜻하지 않은 임신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늘 이 파티의 취지와 목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토론이 끝나고, ‘쿨’과 ‘샤이니’의 공연이 이어지고 나면 광란이 댄스 파티가 펼쳐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에 누군가는 첫 눈에 폭 빠지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즐겁고 안전한 피임과 한께 한 멋진 하룻밤을 응원한다.


Posted by 애플's
여고생 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같이 분명하게 ‘노는’날이 다가올 때면 생리를 늦추는 약을 찾아 먹는 친구들이 있었다. 때론 아랫배를 드릴로 뚫는 거 같은 고통을 그 날 하루만큼은 피해보고 싶은 간절함에 내린 결정이었을 거다.

그만큼 ‘생리’는 즐거운 하루에 큰 방해꾼이다. 성인이 된 후로도 여전히 한 달에 3-4일 때론 1주일 이상 씩 이어지는 배 아픔과 등 아픔, 불쑥불쑥한 신경질, 덩달아 끝을 모르고 치솟는 생리대의 가격 등은 육체적인 고단함을 넘어 정신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안긴다. 가끔은 억울한 느낌마저 드는 거부할 수 없는 여자의 일상이랄까.

지난 주, 오랫만에 만난 친구는 12월 결혼을 앞두고 바로 그 결혼식 날이 꼭 생리일과 겹친다며  ‘약’을 챙겨 먹어야 할지를 물어왔다. 글쎄... 아름다운 신부의 흰 웨딩드레스와 붉은 출혈. 환상의 앙상블은 아니지만 ‘약’ 복용을 적극 추천하진 못했다. 신부의 불편한 몸(마음)가짐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 하루 때문에 생체리듬을 뒤흔들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였다.

사실 나야말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생리를 늦춰주는 영리한 ‘약’이 피임약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그것을 지속적으로 복용해 볼까를 심사숙고 하고 있었다. 그 고민의 시작은 당연하게 ‘안전한 피임’에 있지만, 생리통과 월경 전증후군 (불안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손발이 붓는 등의) 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콘돔으로부터 해방된 아름다운 잠자리를 위해, 그리고 어쩌면 더 고운 피부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피임약을 복용해 보기로 조금씩 마음의 가닥을 잡아갔던 참이었다.

내 나이 서른 해, 첫 피임을 시작하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회사 근처 산부인과에 들러 피임약 처방을 받았다. 의사는 약에 적응하기 까지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호르몬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미세한 불편함이 올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드디어 내 생에 첫 피임약의 복용. 사실 그간 꽤 긴 고심이 이어졌던 건 세간에 퍼져있는 약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들에 겁을 먹은 탓도 있다. 임신이 잘 안된다더라 암에 걸린다더라 구토증상이 있다더라.... 같은.

하지만 피임약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런 소문들이 오해에 불가하다는 걸 조금씩 깨치게 되었다. 우선 피임약을 복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임신 확률은 비슷하다. 불임이나 기형아 출산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 역시 WHO에서 확증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피임약은 도리어 암을 예방해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난소암의 경우, 피임약을 5개월만 복용해도 40% 이상의 난소암 예방 효과가 있고,  5년 이상 복용시에는 난소암 발병률이 60% 가까이 감소한다. 자궁내막암 역시 비슷한 수치의 예방효과가 있다고 밝혀졌다.

그러니까 피임약은 일종의 호르몬제라는, 그리고 그 호르몬이 몸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아 정확한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이롭다라는 사실만 간과하지 않는다면 걱정은 뚝 그쳐도 되는 거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호르몬 조절로 얻을 수 있는 이점들, 예를 들어 여드름 치료 또는 다이어트 등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내가 선택한 피임약 ‘야즈’는 피임은 물론, 월경 전 불쾌장애 증상 치료제임과 동시에 여드름 치료제로도 승인을 받았다. 이 말은 곧, 여드름 걱정이 없는 내게 피지 조절을 어쩌면 두피까지도 한결 고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오호라....

복용 둘째 날, 맞닥뜨린 매스꺼움?

‘야즈’는 24+4=28 즉, 24일 동안 분홍색 정제를 4일 동안 흰색 정제를 빼먹는 방식이다. 생리주기에 맞춰 28일간 분홍약 다음 흰약을 꾸준히 먹는다. 다음 28일도 마찬가지.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이 방식은 월경 주기를 규칙적으로 해주고 피임약 복용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해주는 똘똘함을 갖췄다.

복용 첫날. 저녁을 양껏 먹고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약 한 알을 목구멍에 흘려 넘겼다. 이어 깊은 수면... 걱정한 이상 반응은 없었다.

복용 이튿날. 전 날과 다르게 아침 출근 전 물 한잔과 함께 약을 복용했다. 자기 전 혹시 깜빡 할까봐 애써 부지런을 떨겠다며 내린 결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 오전 매스꺼움을 느꼈다. 약간의 어지럼증과 체한 증상과 비슷한 더부룩함도 왔다. 오후가 되자 차츰 잦아든 증세는 복용 초기에 주로 보이는 호르몬 적응을 위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약 복용 전 의사 상담 시 설명을 들은 바 있어 크게 놀라진 않았다.  새로운 주기를 받아들여 배란을 막기 위해  준비를 다지고 있다는 몸의 반응이었다. 

피임약 복용을 결정하고서 왠지 모를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것이 위험천만했던 젊은 날로부터 벗어나는 강력한 자극과 같았다. 몸을 주체적으로 읽고 능동적 방식의 피임 세계에 들어선 첫 날. 드디어 콘돔과 작별, 적극적인 사랑, 내 몸의 건강한 변화... 이런 것들이 하나 둘 그려지면서 어떤 해방감이 가슴에 꾹꾹 찼다.

아, 내 결정에 후회 없기를...

피임약 복용을 준비하는 여성들을 위한 작은 TIP

하나. 의사의 처방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기 부장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둘.. 피임약은 식사와 상관은 없지만, 경험 상 빈 속 보다는 든든한 상태가,
      이른 아침보다는 잠자기 전이 (복용 초기에는) 더 낫다.
셋.. 흡연자(하루 2갑 이상), 고혈압자 등은 신중하게 투여해야 한다. (역시 의사와 상담이 필요한 부분이다.)






Posted by 애플's
<위기의 주부들> 의 가르시아가 넓은 정원이 한 눈에 보이는 아담한 욕조에 몸을 담근다. 나른하게 몸이 풀리자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이 닿는 작은 서랍을 열고 알약 하나를 입 속에 넣는다. TV를 보던 나는 흐름 상 그게 피임약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왠지 목욕과 피임약이라는 '낯섦' 에 시선이 멈췄다.


고백하면, 피임약을 매일 한 알씩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알게 된 나는 올해로 서른이다. 피임약의 존재는 알았으되 잠자리 다음 날 딱 한번만 약을 구해다 복용하면 되는(응급 피임약) 줄 알았다. 그 약이란 게 산부인과 처방전 없이는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으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무지함으로 위험천만한 임신과 피임의 경계 길을 십 년 넘게 걸어온 셈이다. 나름의 방법은 있었다. 규칙적인 생리주기를 염두해두고 그 날짜를 잘 표시해 뒀다. 어쩌다 빨간 색칠이 입혀진 날 느닷없는 뜨거움과 마주칠 때면 곤란했지만 상황마다 적절하게 대처해 문제를 잠잠케 했다. 콘돔 역시 유용했지만 그건 이상하리만큼 남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가 원하면' 내지는 '그가 갖고 있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매일 꼬박 한 알의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원치 않는 임신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지키는 서양 여성을 보고있자니 동시대를 사는 내가 새삼 나약하게 느껴진다. 단 한번뿐인 인생, 즐거움을 쫓는 노련하고 능동적인 항해사가 되고싶은데 피임에 있어서는 떨어지는 일만 급급하게 해대는 갑판원 같아서 말이다.  

런던에서 머물던 스무살 무렵 온갖 펍Pub 의 여자 화장실마다 콘돔 판매기가 놓여진 걸 보았다. 아니 콘돔과 콘돔 판매기를 동시에 처음 보았다. 당시엔 부끄러워 발음만으로 얼굴이 벌개졌던 ‘콘돔’을 또래의 친구들은 뽑기처럼 뽑아내 핸드백 속에 넣고 당당하게 남친을 만나러 가는구나, 역시 런더너 Londoner 들은 완전 쿨!하구나 싶어 한껏 상기됐던 기억. 그 후로 10년의 세월동안 나는 단 한 차례도 스스로 그것을 준비한 적이 없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구석구석 존재하는 문화적 차이가 한 몫 했을거다.) 이런 나인데 가르시아가 보여준 '먹는 피임약'은 더욱 아득하게 멀다. 피임 성공률 99% 와 각종 암 발생율 감소 그리고 여드름과 다이어트에까지 미치는 놀라운 부가적인 해택이 확실하데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이건 '약'보다는 '자연 치유'의 기다림을 선호했던 우리내 문화 속에서 자란 탓일 지 모른다. 한 달의 27일 동안 연속으로 한 개 얄약을 집어 삼킨다는 건.. 그래서 내게 아직은 어려운 일이다. 아쉬운대로 지갑 속 달력과 색연필이라도 챙겨 넣고 다녀야겠다.


Posted by 애플'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