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깊은 시각. 문득 나를 잠못이루게하는 황군. 잘 지내고 있니?
*
황군과는 그렇게 친하지도 친하지 않지도 않은 그저그런 사이였다. 같은 동아리 친구이기는 했으나, 변변하게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못한 미적지근한 친구였다.
딱 한 번, 황군과 뮤지컬 '사랑을 비를 타고'를 보러 간적은 있었다. 이미 고등학교때 본 뮤지컬이었지만, 황군의 공연 관람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 건, 꽤 괜찮게 보았던 공연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단 둘이 보러 간다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기에 흔쾌히 황군의 제안에 동의를 표했다.
동아리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나와 귀가하던 중, 우연히 좌석버스에서 황군 옆자리에 앉게 된 나는 황군의 뮤지컬 관람 제안에, 좋다고 환호하며 앞,뒤,옆으로 앉아 있는 모든 동아리 사람들에게 다같이 보자고 떠들어댔다. 니들끼리 봐라, 나는 별로 관심 없다며 사양하는 선배들은 이미 황군이 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나는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들었다. 나같은 눈치쟁이가 몰랐다면 믿겠냐마는 나는 하늘에 맹새코 황군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공연을 관람한 이후에도 황군은 나에게 별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쯤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는 외출을 했다. 집에 있는 것이 무슨 죄라도 되듯, 지겨운 고등학교 생활에 분풀이 하듯 계속되는 외출. 눈만 뜨면 집을 나섰고, 달이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귀가하는게 내 일상이었다.
어느날, 12시 좀 넘어 집에 왔을까. 주무시는 부모님이 깰까 조심스레 욕실과 내 방을 오가며 잠잘 준비를 했다. 집안의 고요함을 유지한 채 나는 스르륵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이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받은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황군이었다. 우리집 근처에 왔다가 잠깐 보고 갈까 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아직 귀가를 안한 것 같은데, 올때까지 기다릴테니 들어가기 전에 자기를 보고 가라는 내용이었다. 난 이미 집에 들어왔구먼 어디서 기다렸다는거야?
그 날은 정말 추웠다. 시간이 좀 지난 메세지이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베란다 창밖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저 멀리 사람이 있는듯도 하고 없는 듯도 했다. 걱정하며 잠드느니 그래도 잠깐 나가서 확인이라도 하고 오는게 낫겠다 싶어 잠옷 위에 커다란 코트를 입고 흐트러진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짙어지는 추위에 오들오들 온몸이 절로 떨렸다.
아파트 단지 모퉁이 가로등 아래 황군이 서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황군과 내가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지하철은 다니냐며, 버스는 있냐며 걱정하는 내게, 황군은 몸 뒤로 숨겨둔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나 너 좋아해'
이보다 명쾌한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왜 너의 집앞에 와 있는지, 이 추위에 몇시간을 왜 기다렸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도 거의 없었다. 니가 좋다는 한 마디가 황군이 하고 싶은 말의 전부였다.
황군은 캐나다 이민을 앞두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모두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가기 위한 준비하고 있었으며, 출국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학도 아닌 이민. 가깝지도 않은 바다 건너 저 멀리 캐나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대도 그가 고백을 해 온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갔고, 잠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황군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이불을 덮고 엎드려 황군의 편지를 읽었다.
가족들이 이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죽어도 갈 수 없다며 떼를 쓰고 한국에서 혼자 남아 살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친해지면, 나중에서야 마음을 얘기하려 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른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황군. 너는 나의 첫사랑이라며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 녀석의 마음이 짠하게 전해져왔다.
수줍으면서도 당당한 고백을 남긴 황군은, 그 해 겨울이 끝나기 전 캐나다로 떠났고, 그 작은 고백은 나의 역사 속에 묻혀져갔다.
*
나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 연애를 하고, 이별 하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황군 역시 그렇게 살고 있겠지? 한 번도 그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 적 없지만, 그의 고백만큼은 그립다.
상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이리저리 재고, 눈치를 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말고 느낌이 온다 싶으면 연애가 시작되는 사랑에 묻혀 지내는 중에 문득문득, 황군의 명확하기 이를데 없는 고백이 살아 돌아오는 시대를 기다린다. 아니, 그 시대는 계속되고 있지만 내 나이가 고백을 잃어버린 듯하다.
'Love > 연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보고싶은 우식이 오빠 (0) | 2009/05/08 |
|---|---|
| 참 좁은 서울, 추억이 없는 거리가 없다. (0) | 2009/03/20 |
| 나도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이었다 (4) | 2009/01/23 |
| 대학에 가면 남자가 줄을 선다고!? (9) | 2008/12/09 |
| 로맨스를 만들지 못한 자의 외로운 셀카 (7) | 2008/09/08 |
|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물으신다면...!? (6) | 2008/08/20 |




